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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 Christo

부자와 나사로


 

누가복음에서 본문의 위치

 

누가복음 16장 19절에서 31절에 등장하는 예수의 부자와 나사로 비유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여행(눅 9:51-19:27)의 가운데 놓여있다. 이 여행은 예수가 예루살렘을 목적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밝힘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이 여행의 목적지 예루살렘은 예수 사역의 정점인 십자가와 부활을 향하는 것이다.

이 여행에서 예수의 사역은 치료와 같은 기적보다는, 가르침과 논쟁, 제자들을 준비시키는 것에 그 초점이 있다. 특히 많은 부분에서 적대자들과의 대립이 부각된다. 이러한 대립의 부각은 예수 사역의 정점인 예루살렘과 십자가를 중심성을 강화시킨다. 특히 이 과정에서 예수는 수용되고 추앙되기 보다는 거부되고 대립된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의 율법교사와의 갈등(10:25-37), 예수를 바알세불과 한편으로 모함함(11:14-26), 바리새파와 율법교사들에 대한 책망(11:37-53), 바리새 위선에 대한 경고(12:1-12), 잃은 양 비유(15:1-7), 율법과 하나님 나라 이야기(16:14-18)등이 모두 그렇다.

눅 16:19-31절의 부자와 나사로 비유 또한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 바리새인에게 예수가 전하는 경고의 메시지로 볼 수 있다. 이 비유는 예루살렘을 향하는 여행에서 중앙 부분에 나타난다. 또한 이 비유는 다른 비유들과 함께 나타난다. 누가복음 15-16장에는 연속적으로 5개의 비유가 나타난다. 잃은 양을 찾는 목자(눅 15:3-7), 잃은 동전을 찾은 여인(15:8-10), 잃은 아들을 찾는 아버지15:11-32), 지혜로운 청지기(16:1-9), 그리고 부자와 나사로(16:19-32) 비유가 그것이다. 이러한 비유들의 연속은 누가의 약자와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과 바리새, 서기관 등에 대한 적대적인 관점을 나타내고 있다.

 

초대교회의 일반적 경제상황

헬레니즘 시대의 헬라 국가들은 광대한 지역으로 확장되어 있었다. 다양한 민족들은 수백만 명의 인구를 보유했다. 많은 민족과 다양한 경제 구조들을 지닌 거대 제국에서 통일된 경제 체제를 시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군대를 유지하고 전쟁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막대한 경비와 계속 증가하는 왕실과 관리들의 유지에 필요한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서 조폐와 화폐 정책을 통제해야 했다. 헬라화된 왕국들은 모두 유사한 세금 제도를 사용하였지만, 그 밖의 점령지에서는 세금 징수 청부인 제도를 두었다. 세금 징수 청부인은 해마다 직접 왕에게 입찰하기 위해 본국으로 갔고 최고 가격 입찰자가 대게 특허를 받았다.

더욱이 정부와 성전에 세금을 내야하는 팔레스타인 지역 농민들은 큰 부담을 앉고 살 수 밖에 없었다. 학자에 따라 유대 농민들에게 부과된 이중 과세의 합이 수확량의 40%가 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농민들은 빚에 몰리게 되었다.

예루살렘은 헤롯 왕조의 통치 아래서 왕도로서의 영광을 누렸다. 웅장한 건축물들이 세워지고 화려한 축제 경기가 열렸다. 화려한 궁정생활을 부요했고, 세금을 바탕으로 궁정에선 사치스런 생활을 했다. 그리고 대상인, 토지소유자, 세금청부업자, 대부업자 등과 예루살렘의 사제계금과 레위인, 서기관 등은 많은 재산을 축적하고 있었다. 그들은 영세한 농민들이 자신들의 삶을 걱정해야 하는 반면에 재산을 축적한 계층은 사치스럽게 그 땅 밖에서 살고 있었다.

자기 작업장을 가지고 물건을 만들어 내던 수공업자와 여관업을 하던 사람들, 성전의 노동자, 그리고 하급 사제들, 어부들과 소농들은 때로는 빈곤한 가운데 처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자신들의 생활을 유지해 나갈 수 있었다. 그들 가운데 소농이 대다수이며 이들은 평균 8-10 헥타르의 땅을 6-9명 가족 전체가 경작하여 소출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흉년이나 갑작스런 질병, 전쟁과 노략질은 종종 그들을 가난한 자로 떨어지게 했다. 막 12:41-44에 나오는 가난한 과부와 같이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있었다. 일용직 노동자, 소작인, 무직자 등이 가난한 자에 속해있었다. 또한 당시에 나오는 가난한 무리에 속해있었으며 이들의 생활은 비참했을 것으로 유추된다.

 

누가와 가난한 자, 부자

누가복음은 다른 복음서들 보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이 크다. 누가복음에만 나타나는 몇몇 자료들이 그 관심을 강조한다. 찬가(1:46-55)역시 종말론적인 전환을 기대하며, 본문인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 역시 누가복음에만 나타난다.

반면 누가는 부자에 대해서 일관되게 비평적인 입장을 취한다. 누가에 의하면, 이생의 염려(12:22-34)와 삶의 기쁨과 나란히 놓여 있는 재리(8:14)는 하나님의 말씀을 질식하여 죽게 만드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눅 12:16 이후의 이야기에서 부자 농부는 단지 하나님께 대한 부요함이 중요하다는 것을 간과한다. 예수의 추종 요청을 따르지 못한 관원 이야기는 그가 큰 부자라는 이유로 인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준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누가복음에서 부자들은 예수의 대적자로 등장한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가난한 자의 복 선언에 누가가 부자에 대한 화 선언을 옆에 제쳐 두지 않았는데, 그 화 말씀은 재리의 위험으로써가 아니라 종말론적 의미에 있어서 반적의 역할을 한다.(6:24)


텍스트 안으로

앞에서 언급했듯이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눅 16:19-31)는 텍스트 안에서 바리새인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16장 전체는 문학적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불의한 청지기 비유와 부자와 나사로 비유는 모두 “어떤 부자가 있었다”(ἄνθροπος τἰς ἤν πλουίους)는 동일한 문구로 시작한다. 또한 16장에 나오는 두 비유는 모두 재물의 적절한 사용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16장의 첫 비유에서 제자들에게 부자 청지기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음을 가르친다.(16:1-13)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비웃는다.(16:14)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태도는 당시의 재물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당시 유대교 사회에서 재물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복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리 아래에 있는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과 재물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은 이율배반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에 예수의 이야기는 직접적으로 바리새인을 향한다. 예수는 율법과 하나님 나라 복음에 대해서 가르치고, 부자와 나사로 비유로 바리새인들을 비판한다.

 

비유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은 부자의 등장으로 시작된다.(v19) 그는 날마다 호화로운 잔치를 베풀며 살았다. 그 부자의 호화로운 삶은 아주 상세하게 묘사된다. 그런데 그의 집 대문 앞에는 거지가 있다. 이 부자와 거지의 소개는 몇 가지 대조가 나타난다. 이야기에서 부자는 이름이 거론되지 않는다. 그러나 거지의 이름 나사로(Lavzaro")는 소개된다. 그 이름은 히브리어 ‘엘아자르(rz:[;l]a,)’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이며, 그 의미는 “하나님의 도움, 하나님은 도우시는 분”이다. 이는 누가의 관심, 더 나아가 하나님의 관심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하나님은 부자 보다, 헌데를 앓고 있는 거지에게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대조는 부자는 필요이상, 곧 ‘잉여’를 가지고 좋은 옷과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고 있다. 하지만, 거지 나사로는 필요의 필요 이하, 곧 ‘결핍’으로 인해 최소한의 치료를 받거나나 음식도 구하지도 못하는 상태이다. 부자의 모든 소유는 자기를 향하고 있지만 나사로는 기본적인 필요도 채우지 못하고 있다. 잉여가 결핍으로 오면 잉여와 결핍이 해소되고 균형을 이룬다. 그러나 이야기상에서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이 두 대조적인 인물이 집과 집 대문 앞의 아주 근접한 공간에 놓여 있다. 나사로가 따로 거주하는 곳이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이야기상에서 나사로가 부자와 아주 근접한 곳에 있다는 것은 나사로가 부자와 이웃임을 알 수 있다. 부자에게는 나사로가 그가 도와야할 이웃이 되는 것이다. 이는 우리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눅10:27)는 가장 큰 계명과,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예수가 율법교사에게 “누가 강도 만난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라고 묻는 장면을 떠 올리게 한다.

나사로는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려 한다.(v21)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보통 개에게 주어졌던 것으로 보인다.(마 15:27) 아이러니하게 여기에서 개가 와서 그의 헌데를 핥는다. 개가 핥는 것이 나사로의 고통을 증가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일부 사람에게 위로를 받아야 할 나사로가 개에게 위로 받고 있다는 보는 견해도 있다. 어느 견해를 취하든 개의 등장은 나사로가 개와 같은 처지, 혹은 개보다도 못한 처지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다가 부자와 나사로가 죽게 된다. 여기에서 반전이 나타난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부유하게 살았던 부자는 음부에 내려가고, 하나님께 버림받아(?) 거지생활을 면치 못했던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v22) 이것은 성서 안에서 예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바리새인들에게, 혹은 헬라사회나 유대사회의 관점에 있던 누가복음의 독자들에게 큰 반전이 된다.

음부에서 고통 받던 부자는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았다.(v23) 이 비유에서 또 하나 놀라운 것은 부자는 고통 중에서 아브라함과 나사로를 보고 있으며, 살아 있을 때부터 나사로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v27) 부자의 집 앞에서 도움을 구하던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안식을 얻게 되었고, 살아서 호화롭게 살던 부자는 아브라함과 나사로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도움을 청하는 부자(v24)에게 아브라함은 ‘살아서 호사를 누린 부자는 고통을 받게 되고, 살아서 괴로움을 겪던 나사로는 위로를 받음’(v25)을 이야기 한다. 예수의 평지설교에서 가난한 자는 천국을 소유한 자들이었지만 부요한 자들은 이미 위로를 받았기 때문에 그들은 위한 위로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음이 전해진 바 있다.(6:22-26)

다시 아브라함은 음부와 아브라함 사이의 큰 구렁으로 건널 수 없는 간격이 있음을 주지시킨다.(v26) 이 두 간격은 볼 수도 있으며 이야기를 나눌 수는 있으나, 건널 수는 없는 간격이다. 이러한 상황은 부자의 고통을 가중시킨다. 이 이야기의 시작에서 둘이 놓여있는 곳은 집과 집 대문 앞의 간격이었다. 살아서 부자와 나사로가 있던 곳은 언제든지 오고갈 수 있는 곳이었지만, 죽음 이후에 이 둘 사이에 더 이상 오갈 수 없는 먼 간격이 발생한다. 이는 살아있을 때가 부자에게 주어진 기회이었음을 말해진다. 죽음 이후에 더 이상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부자는 이제 자신의 형제들에게 초점을 옮긴다. 형제들이 고통 받는 곳으로 오지 않도록 ‘나사로를 보내서 형제들에게 경고하여 달라’는 것이다.(v27-28) 그러나 이러한 요청역시 거절된다.(v29) 그들은 모세와 예언자들로부터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과 율법을 듣고 따라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계명과 율법을 따른다는 것은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이다. 내러티브 안에서 청자인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있어서 부족함이 없는 자들이었다. 모세는 그들이 따르는 최고의 권위자이다. 그들은 율법을 연구하고 준수하는데 앞장서던 자들이었다. 예수의 비유는 바리새인들이 외적으로 율법에 대한 열심을 보였지만, 정작 율법의 내용과 정신을 따르고 있지 않음을 지적하는 것이 된다.

부자는 죽은 자가 살아나면 자신의 형제들이 회개할 것이라고 말하지만, 아브라함은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 자는 죽은 자가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라 대답한다.(v30-31) 실제로 바리새인들은 죽은 자가 살아난 것을 믿는 것을 거부했다. 누가복음을 벗어나서 볼 때 아이러니 하게도 동명이인인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아나는 인물이다. 살아난 나사로는 다시 죽음의 위협 앞에 놓인다.(요11-12장) 누가복음을 포함한 사복음서 안에서 우리는 죽었다가 살아나는 인물을 찾을 수 있는데 바로 예수이다. 모세와 예언자를 믿지 않는 자들은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아난 예수도 믿지 않는다. 모세와 예언자를 계승한다고 자부하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믿지 않음으로 실제로 모세와 예언자의 계승자가 아님을 드러낸다. 만일 이야기 속에서의 부자, 혹은 비유를 듣는 바리새인들이 모세와 예언자를 믿었다면 그들 역시 아브라함의 품에서 위로를 받게 되었을 것이다.

 

맺는 말

 

누가복음 3장 7-14에서 세례자 요한은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경고한다. 또한 아브라함을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고 한다.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눅3:11) 이것이 요한의 가르침이다. 이러한 강한 행함의 모티브는 누가복음 전체에 강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이것은 재물의 올바른 사용을 강조하는데 이른다. 이 본문은 이러한 행함의 모티브를 강조하면서, 올바른 돈의 사용을 촉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또 본문은 예수와 적대자의 대립관계를 강조한다. 예수의 대립자로 자주 등장하는 바리새인들과의 긴장관계를 증폭시킨다. 이러한 긴장관계는 예수의 적대자들에 의한 예수의 죽음을 떠올리게 한다. 예루살렘을 향하는 예수의 여행에서 텍스트는 여행의 종착점으로 이끌어 가는 촉매제가 된다고 볼 수 있다.

누가문서에서 돈은 항상 부정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유일하게 돈이 의로워 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옳게 사용될 때만 그렇다. 예루살렘을 향하는 여행의 한 복판에 나타나는 부자와 나사로 비유는 행함의 모티브를 강조하면서 올바른 돈의 사용을 강조한다. 나아가 이 올바른 돈의 사용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임을 강조한다.

‘재물로 이웃을 돕는 것을 곧 회개로 보는 것’은 누가복음 본문 흐름의 의도를 넘어서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의 역(易)과 이(裏)는 성립한다고 볼 수 있다. 재물로 이웃을 돕는 것이 곧 회개는 아니지만, 회개는 재물로 이웃을 돕는 것을 가져온다. 다시 말해 재물로 이웃과 가난한 자를 돕지 않으면 참된 회개가 아니라는 것이다.

재물을 자신들을 위해 사용했던 예수 시대의 바리새인을 향한 경고이면서, 누가복음의 독자들에게 회개 이후의 삶이 어떠한 세계관의 변화를 가져와야 하는지를 강조한다. 재물은 모으고 축적하고 누리기보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쓰이기 위한 것임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 더욱 크고 많은 것을 추구하는 한국교회와 재물의 사용이 자신과 자신의 가족의 테두리를 넘어서지 못하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강한 경고의 메시지로 다가온다.